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거우차오 사건 (문단 편집) === 중일교섭 === 7월 8일 오전 2시, 마쓰이 타쿠로는 친더춘에게 완핑현성 안에 조사를 실시하게 해달라고 다시 요구하는 한편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군사력으로 완핑현성을 포위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친더춘은 완핑현장 [[https://zh.wikipedia.org/wiki/王冷斋|왕렁자이]], 외교위원 위종한을 파견하여 교섭하게 했다. 왕렁자이는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219단 단장 지싱원과 37사단장 펑즈안에게 요청하여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완핑현성 인근을 수색하였고 일본군 8중대 전원도 심야에서 실종된 병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문제는 실종된 병사는 잘못된 식사 탓인지 설사를 했던 것이 원인으로 점호 20분 후에 무사히 복귀했다는 것이다. 이미 복귀한 병사가 수색한다고 나올 리도 없었고 '''문제의 병사조차도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어둠 속을 헤매는''' 코미디 영화를 방불케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뒤늦게야 문제의 병사가 복귀한 것을 알게 된 시미즈 대위는 병사의 명예를 위해서 차마 보고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상부에 알리지 않았다. 한편 일본군 공병대의 공작으로 베이핑과 완핑현 사이의 전화선이 절단되어 불통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오전 3시 30분, 지싱원은 일본군 보병 4,5명이 산포와 기관총을 가지고 펑타이에서 루거우차오로 이동하고 있는 것을 포착했다. 합동 조사를 위해 자동차를 타고 완핑현성으로 이동하던 왕렁자이는 300명의 일본군이 대형 자동차를 타고 출동하는 것을 확인했으며 완핑현성 동북쪽의 사강 지역에서 다수의 일본군이 배치되어 전투 상태에 들어간 것을 확인했다. 친더춘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지싱원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루거우차오 및 완핑현성을 고수하라. 국토의 방위는 군인의 천직이다. 완핑형성, 루거우차오를 우리 군의 가장 영광스러운 분묘로 삼으라. 그러나 일본군이 발포하기까지는 절대로 쏘지 마라. 일본이 만일 먼저 발포하면 이에 응수해 공격하라." 왕렁자이와 린겅위가 완핑현성 안으로 들어오자 무타구치 렌야가 갑자기 면담을 요청했다. 왕렁자이를 만난 무타구치는 사건을 해결할 권한이 있는지를 물어보며 별 것 아닌 사건을 과장해서 취급하는 등 트집을 잡아댔다. 새벽 4시, 완핑현성 내부의 행정감찰전원 공서에서 완핑현장 왕렁자이, 허베이성 주석 겸 37사단장 펑즈안, 베이핑 시장 겸 29군 부군장 친더춘이 일본 측과 교섭하기로 하였다. 일본 측 대표로는 일본군 특무기관장 마쓰이 대좌, 기찰정무위원회 고문 [[https://ja.wikipedia.org/wiki/桜井徳太郎_(陸軍軍人)|사쿠라이 도쿠타로]][* 나중에 [[삼무사건]]을 주도한다.] 중좌가 배석했다. 펑즈안이 먼저 문제의 장소에는 중국군이 없었으므로 중국군이 발포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항변했다. 그제야 마쓰이가 문제의 병사가 귀대했음을 밝히고 다음과 같이 제의했다. >"행방불명의 상황을 분명히 해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쌍방 합동으로 조사하자." 이에 완핑현장 왕렁자이는 "그런 문제라면 행방불명병 자신에게 물어보면 될 것 아니냐. 더욱 자세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면 쌍방에서 조사원을 파견하면 될 일 아닌가."라고 반박했지만 마쓰이는 완강하게 쌍방 합동 조사를 요구했다. 도쿄에서 보고를 받은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면서 현지에 해결의 일임을 맡기는 등 어쨌거나 일본군 스스로 생각해도 워낙 황당한 일이라 별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